리카르도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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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카르도 드리고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하며 발레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878년 러시아로 이주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했으며, 1886년 황실 발레단의 악장으로 데뷔하여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개정판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마법의 피리', '요술 부적', '플로라의 각성', '아를레키노의 백만' 등 다수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으며, 1919년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오페라 작곡과 지휘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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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드리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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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리카르도 에우제니오 드리고 |
출생 | 1846년6월 30일 |
출생지 | 25x20px 롬바르도-베네토 왕국, 파도바 |
사망 | 1930년10월 1일 |
사망지 | 이탈리아 왕국 파도바 |
국적 | 이탈리아 |
직업 | |
분야 | 오페라, 발레 음악 작곡가, 지휘자 |
음악 활동 | |
활동 기간 | 해당사항 없음 |
장르 | 이탈리아 오페라, 발레 음악 |
2. 생애
리카르도 드리고는 1878년 파도바의 오페라 시즌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극장 지휘자 카를 키스테르 남작의 초청으로 러시아로 이주했다. 키스테르는 드리고가 지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악보 없이 지휘하는 드리고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드리고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기 위해 6개월 계약을 제안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직후, 드리고는 제국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하던 제국 이탈리아 오페라의 모든 레퍼토리를 지휘했다. 그는 주세페 베르디의 ''아이다''와 ''가면무도회''를 기억만으로 지휘하여 경영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모든 연극 공연이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드리고의 공연은 항상 칭찬과 함께 보도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1884년 이탈리아 황실 오페라단을 해산했고, 드리고는 자리를 잃게 되었다. 188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세이 파프코프가 은퇴하면서 드리고는 발레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는 체사레 푸그니의 악보에 맞춰진 ''파라오의 딸''을 공연했으며, 발레 애호가였던 황제와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참석했다. 황제는 드리고의 지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기립 박수를 보냈다.
황실 극장의 공식 발레 음악 작곡가였던 루드비히 밍쿠스가 1886년 은퇴하자, 감독 이반 브세볼로즈스키는 드리고를 악장이자 음악 감독이라는 이중 직책으로 고용했다. 드리고는 마리우스 프티파의 요청에 따라 악보를 수정하고 추가하는 등, 상근 작곡가의 모든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프티파는 1886년 비르지니아 주키를 위해 쥘 페로의 ''에스메랄다''를 부활시켰고, 드리고는 체사레 푸그니의 오래된 악보를 보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드리고는 발레리나 주키의 극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4부분으로 구성된 ''파 드 액션''을 작곡했으며, 바이올린 솔로는 레오폴트 아우어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에스메랄다''의 부활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리고의 ''파 드 액션''은 현재까지 ''에스메랄다'' 공연 악보의 일부로 남아 있다.
브세볼로즈스키 감독은 드리고에게 ''라 포레 앙샹테'' (''마법에 걸린 숲'')의 악보 작곡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황실 발레 학교의 연례 졸업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했다. 드리고의 악보는 "경험 많은 작곡가, 취향이 있는 사람, 훌륭한 오케스트레이터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았다.
1888년 프티파는 ''라 베스탈''을 준비하면서 엘레나 코르날바의 요청으로 드리고에게 추가 변주곡 작곡을 의뢰했다. 드리고는 ''L'echo'' (''The Echo'')와 ''Valse mignonne'' (''Sweet Waltz'') 등 두 개의 추가 변주곡을 작곡했다.
코르날바는 다음 발레 ''요술 부적''(Le Talisman)의 전체 악보를 드리고에게 의뢰했다. 1889년 초연된 이 발레의 줄거리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드리고의 악보는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드리고의 악보가 "짧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했다.
드리고는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요청으로 구 발레에 삽입할 부가적인 ''바리에이션'', ''파'' 및 부수적인 춤을 작곡했으며, 1919년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거의 모든 발레에 자신의 추가 작품을 포함시켰다.
드리고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와 친밀한 우정을 쌓았으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 초연을 지휘했다. 그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악보를 개정하여 1895년 부활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 판본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드리고는 ''라 플루트 마지크(La Flûte magique)'' (1893), ''플로라의 각성(Le Réveil de Flore)'' (1894), ''라 페르(La Perle)'' (1896), ''아를레키노의 백만''(Les Millions d'Arlequin) (1900) 등 다수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특히 ''아를레키노의 백만''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중 ''세레나데''는 베냐미노 질리를 위한 가곡으로도 발표되었다.
1902년 드리고는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발레 ''라 코트 다쥐르(La Côte d'Azur)''를 초연했다. 그의 마지막 오리지널 전막 발레는 ''장미 봉오리와 나비의 로맨스(La Romance d'un Bouton de rose et d'un Papillon)''였으나, 러일 전쟁으로 인해 초연이 취소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드리고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후, 그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전 황실 마린스키 극장으로 복귀하여 지휘자로 활동했다.
2. 1. 러시아에서의 활동 (1878-1919)
리카르도 드리고는 1878년 파도바의 오페라 시즌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극장 지휘자 카를 키스테르 남작의 초청으로 러시아로 이주했다. 키스테르는 드리고가 지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악보 없이 지휘하는 드리고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드리고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기 위해 6개월 계약을 제안받았다.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직후, 드리고는 제국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하던 제국 이탈리아 오페라의 모든 레퍼토리를 지휘했다. 그는 주세페 베르디의 ''아이다''와 ''가면무도회''를 기억만으로 지휘하여 경영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모든 연극 공연이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드리고의 공연은 항상 칭찬과 함께 보도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1884년 이탈리아 황실 오페라단을 해산했고, 드리고는 자리를 잃게 되었다. 188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세이 파프코프가 은퇴하면서 드리고는 발레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는 체사레 푸그니의 악보에 맞춰진 ''파라오의 딸''을 공연했으며, 발레 애호가였던 황제와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참석했다. 황제는 드리고의 지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기립 박수를 보냈다.
황실 극장의 공식 발레 음악 작곡가였던 루드비히 밍쿠스가 1886년 은퇴하자, 감독 이반 브세볼로즈스키는 드리고를 악장이자 음악 감독이라는 이중 직책으로 고용했다. 드리고는 마리우스 프티파의 요청에 따라 악보를 수정하고 추가하는 등, 상근 작곡가의 모든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프티파는 1886년 비르지니아 주키를 위해 쥘 페로의 ''에스메랄다''를 부활시켰고, 드리고는 체사레 푸그니의 오래된 악보를 보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드리고는 발레리나 주키의 극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4부분으로 구성된 ''파 드 액션''을 작곡했으며, 바이올린 솔로는 레오폴트 아우어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에스메랄다''의 부활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리고의 ''파 드 액션''은 현재까지 ''에스메랄다'' 공연 악보의 일부로 남아 있다.
브세볼로즈스키 감독은 드리고에게 ''라 포레 앙샹테'' (''마법에 걸린 숲'')의 악보 작곡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황실 발레 학교의 연례 졸업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했다. 드리고의 악보는 "경험 많은 작곡가, 취향이 있는 사람, 훌륭한 오케스트레이터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았다.
1888년 프티파는 ''라 베스탈''을 준비하면서 엘레나 코르날바의 요청으로 드리고에게 추가 변주곡 작곡을 의뢰했다. 드리고는 ''L'echo'' (''The Echo'')와 ''Valse mignonne'' (''Sweet Waltz'') 등 두 개의 추가 변주곡을 작곡했다.
코르날바는 다음 발레 ''요술 부적''(Le Talisman)의 전체 악보를 드리고에게 의뢰했다. 1889년 초연된 이 발레의 줄거리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드리고의 악보는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드리고의 악보가 "짧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했다.
드리고는 프티파와 이바노프의 요청으로 구 발레에 삽입할 부가적인 ''바리에이션'', ''파'' 및 부수적인 춤을 작곡했으며, 1919년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거의 모든 발레에 자신의 추가 작품을 포함시켰다.
드리고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와 친밀한 우정을 쌓았으며,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호두까기 인형'' 초연을 지휘했다. 그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악보를 개정하여 1895년 부활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 판본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드리고는 ''라 플루트 마지크(La Flûte magique)'' (1893), ''플로라의 각성(Le Réveil de Flore)'' (1894), ''라 페르(La Perle)'' (1896), ''아를레키노의 백만''(Les Millions d'Arlequin) (1900) 등 다수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특히 ''아를레키노의 백만''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중 ''세레나데''는 베냐미노 질리를 위한 가곡으로도 발표되었다.
1902년 드리고는 몬테카를로 오페라에서 발레 ''라 코트 다쥐르(La Côte d'Azur)''를 초연했다. 그의 마지막 오리지널 전막 발레는 ''장미 봉오리와 나비의 로맨스(La Romance d'un Bouton de rose et d'un Papillon)''였으나, 러일 전쟁으로 인해 초연이 취소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드리고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후, 그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전 황실 마린스키 극장으로 복귀하여 지휘자로 활동했다.
2. 2. 이탈리아 귀국과 말년 (1919-1930)
1919년 드리고는 마침내 고국인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구 제정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린 그의 고별 갈라에서 발레 마스터 표도르 로푸호프는 드리고와 페티파의 마지막 협업 작품인 발레 《라 로망스 d'앙 부통 드 로즈 에 d'앙 파피용》(La Romance d'un Bouton de rose et d'un Papillon)의 새로운 버전을 올렸는데, 로푸호프는 이 작품을 《르 콩트 뒤 부통》(Le Conte du bouton, 《장미 봉오리의 이야기》)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다. 갈라가 끝나갈 무렵, 표도르 샬리아핀은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로 감동적인 작별 연설을 했다. 60kg만 가지고 갈 수 있었던 드리고는 러시아에 있던 모든 소지품을 남겨두고, 필사 악보 모음집만 챙겨 오데사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파두아로 가는 두 달간의 여정에서 베개로 사용했다.1920년 드리고는 여러 해 전에 경력을 시작했던 파두아의 테아트로 가리발디의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수락했다. 1926년 그는 파두아 테아트로 베르디의 오페라단을 위해 코믹 오페라 《플래피 래플스》(Flaffy Raffles)를 작곡했으며, 1929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일 가로파노 비안코》(Il garofano bianco, 《하얀 카네이션》)가 테아트로 가리발디에서 공연되었다. 그는 남은 생애를 지휘하고 미사와 다양한 노래를 작곡하며 보냈다.
리카르도 드리고는 1930년 10월 1일, 그의 출생지인 파두아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재 파두아에는 그를 기리는 의미로 ''비아 리카르도 드리고''(Via Riccardo Drigo)라는 거리가 있다.
3. 주요 작품
- 마술 플루트
- 진주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1884년 이탈리아 황실 오페라단을 해산하여 오페라단의 악장인 드리고는 자리를 잃게 되었다. 188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발레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세이 파프코프는 은퇴했고, 드리고는 1886-1887 시즌 시작 전에 이 자리를 맡았다. 1886년 에 체사레 푸그니의 악보에 맞춰진 ''파라오의 딸''을 공연하며 발레 지휘자로 데뷔했다. 황제는 드리고의 지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기립 박수를 보냈고, 다른 관객들도 이를 따랐다.
루드비히 밍쿠스는 1886년 은퇴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극장의 감독 이반 브세볼로즈스키는 상근 발레 작곡가의 직책을 폐지했다. 드리고는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브세볼로즈스키는 그를 악장이자 음악 감독으로 고용했다.
마리우스 프티파는 1886년 비르지니아 주키를 위해 쥘 페로의 ''에스메랄다''를 부활시켰다. 드리고는 푸그니의 오래된 악보를 보수하고, 주키의 극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4부분으로 구성된 ''파 드 액션''을 작곡하도록 의뢰받았다. 여기에는 레오폴트 아우어를 위한 바이올린 솔로가 포함되었다. ''에스메랄다''의 부활은 에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리고의 ''파 드 액션''은 현재까지 ''에스메랄다'' 공연 악보의 일부로 남아 있다.
''에스메랄다'' 악보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브세볼로즈스키 감독은 드리고에게 완전한 발레 악보 ''라 포레 앙샹테'' (''마법에 걸린 숲'')를 작곡하도록 했다. ''라 포레 앙샹테''는 황실 발레 학교의 연례 졸업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에 학교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마린스키 극장 무대로 옮겨져 에 초연되었다. 드리고의 악보는 "교향악적인 면에서 뛰어나고, 경험 많은 작곡가, 취향이 있는 사람, 훌륭한 오케스트레이터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았다.
1888년 프티파는 ''라 베스탈''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레나 코르날바는 프티파에게 더 ''댄서블''한 음악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고, 드리고가 추가 댄스를 작곡하게 되었다. 드리고는 코르날바를 위해 ''카논''으로 쓰인 ''L'echo'' (''The Echo'')와 ''Valse mignonne'' (''Sweet Waltz'')라는 두 개의 추가 변주곡을 작곡했다.
3. 1. 오페라
- 돈 페드로 디 포르토갈로(Don Pedro di Portogallo)는 1868년 7월 25일 파도바 신 베르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라 모글리에 라피타(La Moglie Rapita)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플라피 래플스(Flaffy Raffles)는 1926년 파도바 베르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일 가라파노 비앙코(Il Garafano Bianco)는 1929년 가리발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마술 플루트》
- 《진주》
3. 2. 발레
리카르도 드리고는 많은 발레 작품을 작곡했다. 1893년 제국 발레 학교의 연례 졸업 공연을 위해 작곡한 1막 발레 ''마법의 피리(La Flûte magique)''는 모든 사람을 춤추게 하는 마법의 악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레프 이바노프가 연출했다. 이 발레는 발레 학교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미하일 포킨이 출연했다. 이후 마린스키 극장으로 옮겨져 확대된 무대로 상연되었다.1889년에는 엘레나 코르날바의 요청으로 ''요술 부적''(Le Talisman)의 전체 악보를 담당했다. 이 발레는 에 초연되었는데, 줄거리는 비판을 받았지만 드리고의 악보는 발레 음악의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드리고의 악보가 자신에게 "짧은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회고했다.
1894년에는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녀와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페테르호프 궁전에서 열린 축제를 위해 ''플로라의 각성(Le Réveil de Flore)''을 작곡했다. 의 초연은 성대한 행사였으며, 드리고는 성 안나 훈장을 수여받았다. ''플로라의 각성''은 이후 마린스키 극장 무대로 옮겨졌고, 안나 파블로바를 포함한 당대 발레리나들의 사랑을 받았다.
1896년에는 니콜라이 2세 차르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대관식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갈라를 위해 ''라 페르(La Perle)''를 작곡했다.
1900년에는 에르미타주 극장에서 ''아를레키노의 백만''(Les Millions d'Arlequin)을 초연했다. 마틸드 크셰신스카가 콜롬빈 역을, 게오르기 뱌체슬라보비치 캬크슈트가 아를레키노 역을 맡았으며, 황제와 황후를 포함한 황실 전체가 참석하여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드리고의 다른 주요 발레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마법의 숲''(La Forêt enchantée) (1887)
- ''장미 봉오리와 나비의 로망(La Roman d'un Bouton de rose et d'un Papillon)'' (1904, 초연은 취소되었으나 1919년 공연)
3.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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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산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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